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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소설13 / 15편7분

《면역》

13편: 면역세포

이타인클럽 · 2026.10.24

도윤은 한동안 노트의 마지막 문장을 바라봤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라를 바꿀 수도 없었다.

법을 만들 수도 없었다.

신문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검찰도,

법원도,

국회도,

정부도

자신이 손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도윤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항암치료를 받고 이제 겨우 회사에 복귀한,

스물아홉 살 직장인.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우스웠다.

그런데 문득 자기 몸이 떠올랐다.

면역세포 하나가 몸 전체를 치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기 앞에 나타난 이상을 발견하고,

신호를 보내고,

필요하면 반응했다.

그것뿐이었다.

도윤은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내 앞의 이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복귀한 지 사흘째였다.

회의실 모니터에 이번 분기 실적이 떠 있었다.

목표.

실적.

전망치.

팀장이 말했다.

“이 수치는 그대로 올라가면 설명하기가 좀 어렵겠네요.”

도윤은 그 말을 알고 있었다.

‘설명하기 어렵다.’

예전 회사생활에서는 그 다음 문장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조금 정리하자.

표현을 바꾸자.

기준을 바꾸자.

보기 좋게 만들자.

팀장이 말했다.

“지난 분기 방식으로 맞춰서 다시 정리해주시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노트북 키보드 소리만 들렸다.

도윤도 예전 같았으면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회사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가 나선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속 장면이 떠올랐다.

이상세포 하나.

면역세포가 그것을 본다.

그리고 지나간다.

또 하나가 지나간다.

도윤은 손을 들었다.

“팀장님.”

모든 시선이 돌아왔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암 진단을 들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빨랐다.

“실제 수치를 그냥 쓰면 안 될까요?”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뜻이죠?”

“설명이 필요하면 설명을 붙이고요.”

잠시 정적.

“숫자 자체를 맞추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민석이 도윤을 바라봤다.

팀장이 말했다.

“도윤 씨.”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회사생활 복귀하자마자 너무 원칙적인 거 아닙니까?”

누군가 작게 웃었다.

도윤도 웃었다.

손에는 땀이 났다.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말했다.

“그래도 실제 숫자는 실제 숫자니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장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팀장이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도윤이 해고되지도 않았다.

회의는 조금 어색하게 계속됐다.

결국 보고서에는 실제 수치가 들어갔다.

설명 한 줄이 추가됐다.

끝이었다.

그렇게 작은 일이었다.

도윤은 퇴근길에 허탈할 정도였다.

자신은 마음속으로 엄청난 싸움을 한 것 같았는데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민석이 말했다.

“형.”

“왜?”

“아까 잘했어요.”

도윤이 웃었다.

“뭘.”

민석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왜 말 안 했어?”

민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 혼자 말하면 이상한 사람 될까봐.”

도윤은 그 말을 듣고 멈췄다.

한 사람이 움직이자

다른 사람도 자신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도윤은 몸속 면역반응을 떠올렸다.

면역세포 하나가 이상을 발견한다.

신호를 보낸다.

다른 세포들이 모인다.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같은 시간.

도윤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도 작은 일이 하나 일어나고 있었다.

신문사 편집국.

젊은 기자 서현은 데스크 앞에 서 있었다.

“이 문장 빼.”

“왜요?”

“확인 안 됐잖아.”

서현이 자료를 내밀었다.

“확인됐습니다.”

“공식 문서도 있고요.”

데스크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 분위기에 굳이 넣을 필요가 있어?”

서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몇 초 뒤 말했다.

“분위기하고 사실은 다르잖아요.”

데스크가 서현을 바라봤다.

“너 요즘 왜 이렇게 피곤하게 하냐?”

서현은 웃지 않았다.

“제가 확인한 건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작은 문장 하나가 기사에 남았다.

세상을 뒤집는 기사는 아니었다.

조회수도 높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하나가 지워지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어느 구청의 공무원 정우는 결재 문서를 보고 있었다.

상사가 말했다.

“이건 날짜만 좀 맞춰.”

정우가 물었다.

“실제 처리일하고 다른데요.”

“다들 그렇게 해.”

정우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다들 그렇게 해.

그는 원래 같았으면 수정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원래 날짜를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메모를 남겼다.

실제 처리일 기준.

그것뿐이었다.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다.

저녁.

도윤의 어머니는 가족 단체방에 영상을 하나 올리려다가 멈췄다.

충격적인 제목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공유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원문부터 봐.”

어머니는 검색했다.

조금 뒤 영상을 지웠다.

대신 한 문장을 올렸다.

“확인해보니까 내용이 좀 다르네.”

그것 역시 세상을 바꾸지 않았다.

밤.

한 대학생은 댓글을 쓰다가 멈췄다.

한 자영업자는 기사를 끝까지 읽었다.

한 교사는 학생에게 자료의 출처를 물었다.

한 개발자는 시스템의 변경 기록을 삭제하지 않았다.

한 간호사는 작은 이상 수치를 다시 확인했다.

한 판사는 기록 한 줄을 더 읽었다.

각자는 서로를 몰랐다.

자신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무도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앞에 나타난 이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도윤은 그날 저녁 집에서 항암치료 때 찍어둔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던 날.

병원 침대.

수액.

멍든 팔.

그리고 치료가 잘되고 있다는 검사 결과.

그는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살린 사람의 이름을 한 명만 말할 수 없었다.

담당 의사.

병리과 의사.

영상의학과.

간호사.

약사.

검사실 직원.

그리고 치료를 견뎌낸 자신의 몸.

수없이 많은 사람이

각자의 일을 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도윤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도윤을 살렸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도윤은 살아가고 있었다.

도윤은 예전에 적어놓은 페이지를 펼쳤다.

구세주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아래.

치료자

또 선.

마지막으로 남은 단어.

촉매

옆에는 이재명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윤은 한참 바라봤다.

이제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사람 혼자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도윤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던진 질문 때문에

자신이 처음으로 사회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도윤은

그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다음 날 점심시간.

민석이 뉴스를 보며 말했다.

“형, 이거 봤어요?”

도윤이 화면을 바라봤다.

민석이 말했다.

“진짜인가?”

도윤은 예전 같았으면 자기 의견부터 말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말을 했다.

“원문 봤어?”

민석이 멈췄다.

“아니.”

“그럼 같이 보자.”

둘은 기사를 내려갔다.

출처를 찾았다.

관련 자료를 열었다.

별것 아닌 장면이었다.

사무실 구석에서 회사원 두 명이 휴대전화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도윤에게는 아주 다르게 보였다.

몸속에서 면역세포 두 개가

같은 이상 신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도윤은 꿈을 꾸었다.

이전 꿈과 같은 거대한 몸이었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 혼자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검은 점 하나가 나타났다.

가까이 있던 작은 빛 하나가 반응했다.

또 다른 빛이 켜졌다.

그 옆의 빛도 켜졌다.

신호가 번졌다.

하나.

열 개.

백 개.

수천 개.

수백만 개.

몸 전체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상세포가 사라졌다.

다른 곳에서 또 하나가 생겼다.

이번에는 더 빨리 발견됐다.

또 다른 곳에서도 이상이 생겼다.

거기에서도 빛이 켜졌다.

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상세포는 계속 생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몸이 보고 있었다.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몸이 살아 있었다.

도윤은 잠에서 깼다.

창밖에 아침 햇빛이 들어왔다.

그는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크게 적었다.

면역은 영웅이 아니다.

그 아래.

면역은 관계다.

또 한 줄.

서로 다른 수많은 세포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이상을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고, 함께 반응하는 것.

도윤은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썼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방법은 좋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면역세포가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장 아래에

아주 작게 덧붙였다.

나부터.

도윤은 노트를 덮었다.

세상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다.

대신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못 본 척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으니 확인하고,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해도 먼저 사실을 보고,

잘못을 발견하면 가능한 범위에서 말하고,

잘못 판단했다면 다시 고치기로 했다.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몸의 면역체계 역시

거대한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도윤은 이제야 알았다.

그게 몸을 살리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사회를 살리는 방법도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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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