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여전히 한 가지를 믿고 있었다.
몸 전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람 한 명을 바꾼다고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언론과 법과 경제와 정치와 시민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마지막 믿음이 남아 있었다.
시작하는 사람은 필요하다.
누군가는 첫 번째 칼을 들어야 한다.
누군가는 병든 곳을 열어야 한다.
누군가는 아무도 손대지 못한 곳에 손을 대야 한다.
그리고 도윤에게 그 사람은 여전히 이재명이었다.
어느 날 저녁.
도윤은 뉴스 생중계를 보고 있었다.
작품 속 정부가 오래된 제도를 바꾸는 개혁안을 내놓은 날이었다.
도윤은 내용을 하나씩 읽어봤다.
처음에는 기대가 컸다.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구조.
서로 감시해야 할 기관들이 제대로 견제하도록 만드는 장치.
정보를 더 공개하고,
권한을 나누고,
책임을 명확히 하는 변화.
도윤은 노트에 적었다.
치료 시작.
그 두 글자를 동그라미로 둘러쌌다.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드디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음 날부터 반응이 쏟아졌다.
정치권에서는 반대가 시작됐다.
관련 기관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해관계를 가진 조직들이 반발했다.
언론마다 전혀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어떤 곳에서는 개혁이라고 했고,
어떤 곳에서는 위험한 변화라고 했다.
시민들도 갈렸다.
도윤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몸에 약을 넣으면 반응이 나타나듯,
사회도 치료를 시작하면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한 조항이 빠졌다.
다른 조항이 수정됐다.
시행 시기가 미뤄졌다.
누군가는 조직 안에서 반대했다.
누군가는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누군가는 동의하면서도 행동하지 않았다.
도윤은 답답했다.
“왜 그냥 하면 안 되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뭘?”
“필요한 거면 그냥 바꾸면 되잖아.”
준호가 웃었다.
“나라가 회사 프로젝트냐?”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기분 나빴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며칠 뒤 병원에서 도윤은 항암치료를 받았다.
약물이 천천히 몸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유난히 힘들었다.
구역질이 났고,
머리가 아팠고,
몸 전체가 무거웠다.
도윤은 간호사에게 말했다.
“약이 암세포만 죽이면 좋을 텐데요.”
간호사가 웃었다.
“그러게요.”
“그러면 이렇게 힘들 필요도 없을 텐데.”
간호사가 잠시 약물을 확인했다.
“몸이 워낙 복잡하니까요.”
도윤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몸이 워낙 복잡하니까.
그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다음 날 의사가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반응은 있습니다.”
도윤이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든 거죠?”
“치료가 암세포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니까요.”
“정상세포도 영향을 받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그럼 더 강한 약을 쓰면 빨리 끝나는 거 아닌가요?”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환자가 먼저 버티지 못할 수 있습니다.”
도윤은 잠깐 웃었다.
“병을 죽이려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의사가 말했다.
“그래서 치료는 균형입니다.”
그 한마디가 도윤을 멈추게 했다.
균형.
집에 돌아온 도윤은 다시 뉴스를 켰다.
개혁안은 더 축소되어 있었다.
처음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도윤은 화가 났다.
왜 밀어붙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타협하는지.
왜 기다리는지.
왜 반대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는지.
그는 화면 속 이재명을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생각했을 것이다.
힘이 있으면 하면 되잖아.
그런데 병원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더 강한 약을 쓰면
환자가 먼저 버티지 못할 수 있다.
도윤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회도 치료 대상이면서
동시에 치료를 견뎌야 하는 몸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도윤은 여전히 답답했다.
어떤 변화는 좌절됐다.
어떤 것은 예상보다 훨씬 느렸다.
어떤 것은 아예 시작하지도 못했다.
온라인에서는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지지했던 사람들도 실망하기 시작했다.
“왜 못하냐.”
“왜 약하냐.”
“왜 저 사람들을 그냥 두냐.”
도윤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결국 노트에 썼다.
왜 못 하는가?
그 아래 크게 적었다.
힘이 없어서?
하지만 곧 그 문장을 지웠다.
권력은 한곳에만 있지 않았다.
국회에도 있었고,
법원에도 있었고,
관료조직에도 있었고,
기업에도 있었고,
언론에도 있었고,
시민에게도 있었다.
그 모든 곳이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 사람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작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도윤은 오래전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거대한 몸 안에서
한 사람이 혼자 걷고 있었다.
검은 세포들을 치우고,
막힌 곳을 열고,
잠든 면역세포를 깨우던 사람.
그때는 멋진 꿈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같은 꿈을 다시 꿨다.
하지만 내용이 달랐다.
한 사람이 몸속을 달리고 있었다.
왼쪽에서 이상세포가 생겼다.
그가 달려가 제거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생겼다.
또 뛰어갔다.
뒤쪽에서 수십 개가 나타났다.
그는 다시 뛰었다.
점점 숨이 거칠어졌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몸은 너무 컸다.
그가 하나를 없애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이상이 생겼다.
도윤은 꿈속에서 소리쳤다.
“빨리요!”
그 사람은 계속 달렸다.
“저기도요!”
또 달렸다.
“거기도요!”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멈췄다.
무릎을 꿇었다.
몸 전체에 수많은 검은 점이 빛나고 있었다.
도윤이 소리쳤다.
“왜 멈춰요?”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도윤은 처음으로 보았다.
그 역시
하나의 세포에 불과했다.
도윤은 잠에서 깼다.
새벽 네 시였다.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침대 옆 노트를 펼쳤다.
예전에 적었던 문장이 보였다.
구세주 — 이재명?
한동안 그 글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물음표를 지웠다.
잠시 생각했다.
이번에는 이름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손을 멈췄다.
대신 ‘구세주’라는 단어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아래에 적었다.
치료자.
그것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적었다.
촉매.
도윤은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촉매.
혼자 모든 것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모든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멈춰 있던 반응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
며칠 뒤 준호와 저녁을 먹었다.
준호가 물었다.
“너 요즘 그 사람 영상 덜 보더라.”
도윤이 웃었다.
“좀 봐.”
“실망했냐?”
도윤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
“그럼?”
“내가 착각했던 것 같아.”
“뭘?”
도윤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한 사람이 나라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준호가 말했다.
“원래 못 하지.”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근데 암에 걸리고 나니까 구세주가 필요했나 봐.”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윤이 이어 말했다.
“내 몸도 누가 대신 치료해줬으면 했거든.”
“의사가 알아서.”
“약이 알아서.”
“나는 그냥 누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
준호가 물었다.
“아닌가?”
도윤이 웃었다.
“의사가 그러더라.”
“치료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 중 하나가 환자 본인이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윤은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수백 명.
퇴근하는 사람들.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들.
졸고 있는 사람들.
아이 손을 잡은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도윤은 갑자기 생각했다.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자신처럼 말한다면?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언론이 알아서.
법원이 알아서.
정치인이 알아서.
대통령이 알아서.
그리고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몸속 수십억 개의 세포가
한 세포에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네가 알아서 우리를 지켜줘.
도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불가능했다.
그날 밤 그는 노트 한 페이지를 찢었다.
그곳에는 오래전 자신이 그린 그림이 있었다.
거대한 몸.
가운데 홀로 서 있는 한 사람.
도윤은 새 페이지를 펼쳤다.
이번에는 몸 전체에 작은 점들을 그렸다.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수백 개.
수천 개.
그 하나하나를 서로 연결했다.
그리고 가운데에 이재명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가장자리의 작은 점 하나 옆에 적었다.
시작.
그 아래에는 이렇게 썼다.
구세주는 몸을 대신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다.
잠시 후 한 줄을 더 썼다.
몸이 스스로 치료를 시작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도윤은 펜을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질문했다.
그렇다면 나도 이 몸의 일부라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 질문은
도윤이 암에 걸린 뒤 처음으로
자신을 환자가 아니라
면역세포로 바라보게 만든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