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상태는 좋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도윤은 모니터를 바라봤다.
몇 달 전과 비교한 영상이 나란히 떠 있었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보였던 병변들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정말 많이 좋아진 건가요?”
“네.”
도윤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면 이제 거의 끝난 거네요?”
의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은 그 침묵을 알고 있었다.
암에 걸린 뒤
좋은 말 뒤에 잠깐 생기는 침묵은
대개 다음 문장이 있다는 뜻이었다.
“치료 반응은 좋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계속 추적해야 합니다.”
도윤의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재발 때문에요?”
“그렇죠.”
그 단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재발.
끝난 줄 알았던 것이
다시 돌아오는 것.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도윤은 휴대전화로 검색했다.
암 재발 이유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었다.
남아 있던 암세포.
치료에 견딘 세포.
미세한 병변.
유전적 변화.
몸의 환경.
암의 종류에 따라 전혀 다른 수많은 가능성.
도윤은 어느 문장에서 손을 멈췄다.
치료 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도윤은 며칠 전 자신의 노트를 떠올렸다.
종양을 제거하는 것과 암을 치료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이제 그 문장 뒤에 하나가 더 붙었다.
없어진 것과 다시 생길 수 없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도윤은 이상하게 화가 났다.
“그럼 대체 언제 끝나는 건데.”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잣말했다.
치료를 받으면 끝날 줄 알았다.
병변이 사라지면 끝날 줄 알았다.
좋은 검사 결과를 받으면
다시 예전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암은 자꾸 질문을 뒤로 미뤘다.
왜 생겼나.
왜 살아남았나.
왜 퍼졌나.
왜 제거했는데 끝나지 않나.
그리고 이제는
왜 다시 생길 수 있나.
도윤은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처음 암에 걸렸을 때는
범인을 찾고 싶었다.
지금은 범인보다
조건이라는 단어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며칠 뒤 회사에 잠깐 들렀다.
몸 상태가 좋아지면서 복귀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기 자리에 앉으니 낯설었다.
책상 위 작은 화분은 민석이 대신 물을 줬는지 살아 있었다.
도윤은 웃었다.
“이것도 살아남았네.”
민석이 커피를 들고 왔다.
“형도 살아남았잖아요.”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하냐.”
둘이 웃었다.
그런데 잠시 뒤 민석이 목소리를 낮췄다.
“형, 예전에 그 숫자 문제 기억나죠?”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어.”
“그때 팀장 바뀌었잖아요.”
“그랬지.”
“요즘 또 그래요.”
도윤이 눈썹을 찌푸렸다.
“뭐가?”
민석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번엔 방식만 좀 달라졌어요.”
회의실.
새 팀장은 이전 팀장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말투도 부드러웠다.
직원들과 점심도 자주 먹었다.
화를 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 익숙한 말이 나왔다.
“목표치하고 너무 차이 나는데요.”
누군가 말했다.
“실제 데이터가 그렇습니다.”
새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겠는데…”
잠시 웃었다.
“보고할 때는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겠죠.”
도윤은 순간 얼어붙었다.
표현만 달랐다.
예전 팀장은 말했다.
“숫자 맞춰.”
새 팀장은 말했다.
“조금 정리합시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불편한 숫자는 사라지고
원하는 숫자만 남았다.
회의가 끝난 뒤 도윤은 민석에게 물었다.
“저 사람도 원래 저래?”
민석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안 그랬어요.”
“그럼 왜 변했어?”
민석은 잠시 생각했다.
“위에서 계속 압박하니까요.”
“뭐라고?”
“목표 못 맞추면 평가 깎이고.”
“팀 실적 떨어지면 조직 개편한다고 하고.”
“그럼 밑에 사람들 성과급도 날아가고.”
민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똑같아지는 거죠.”
도윤은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들어가자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도윤은 몸속 암세포를 떠올렸다.
그날 밤 도윤은 암의 ‘미세환경’에 관한 글을 읽었다.
종양 주변에는 암세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혈관.
면역세포.
주변 조직.
신호물질.
수많은 요소들이 얽혀 있었다.
암은 혼자 존재하지 않았다.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어떤 환경은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했고,
어떤 환경은 오히려 살아남기 쉽게 만들었다.
도윤은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노트에 적었다.
나쁜 세포
잠시 후 줄을 그었다.
그 아래에 새로 썼다.
나쁜 세포가 살아남기 좋은 환경
도윤은 두 문장을 비교했다.
두 번째가 훨씬 무서웠다.
그 뒤부터 회사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문제를 제기하는 직원은 평가에서 손해를 봤다.
상사의 뜻을 빨리 알아듣는 사람은 승진했다.
불편한 숫자를 가져오는 사람보다
좋은 보고서를 만드는 사람이 인정받았다.
처음에는 모두 조금씩 망설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만 남았다.
도윤은 생각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지?
질문이 바뀌었다.
누가 나쁜가.
가 아니라
이 시스템은 어떤 사람을 살아남게 하는가.
도윤은 다시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어떤 정치인이 사라진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어떤 문제가 터진다.
사람들이 분노한다.
몇 달이 지난다.
그리고 비슷한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이제 도윤에게 그것은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사람을 반복시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권력이 커질수록 보상이 커지는 구조.
문제를 말하면 손해를 보는 구조.
침묵하면 안전한 구조.
서로 감시해야 할 조직들이 서로의 편의를 봐주는 구조.
시민이 지쳐서 관심을 끄면
더 쉽게 유지되는 구조.
도윤은 노트에 화살표를 그었다.
보상
↓
적응
↓
침묵
↓
반복
↓
재발
마지막 단어를 쓰는 순간 손이 멈췄다.
재발.
또 암이었다.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왜?”
“사람이 문제일까, 자리가 문제일까?”
준호가 웃었다.
“또 시작이네.”
“진지하게.”
“둘 다 아니야?”
도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런 것 같아.”
“갑자기 왜?”
“회사 팀장 바뀌었는데 똑같은 짓을 해.”
“그럼 그 사람도 나쁜 거겠지.”
도윤이 말했다.
“근데 처음에는 안 그랬대.”
준호가 잠시 조용해졌다.
도윤이 이어 말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다 그렇게 된다면…”
“그러면 사람만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준호가 말했다.
“구조도 바꿔야겠지.”
도윤은 그 말을 듣고 한참 말이 없었다.
너무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이제야 이해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도윤은 이재명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이전처럼 단순한 영웅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람 하나와 싸우는 것은 끝이 있다.
하지만
사람을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구조와 싸우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윤은 자신이 얼마 전 적었던 단어를 바라봤다.
구세주.
그리고 그 옆에 붙어 있던 물음표.
이제 그 물음표의 의미가 달라졌다.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며칠 뒤 병원.
의사는 다시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계속 좋아지고 있습니다.”
도윤이 물었다.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제가 뭘 해야 하죠?”
의사가 말했다.
“암 종류마다 다릅니다.”
“치료 계획을 잘 따르고, 정기적으로 검사하고, 몸 상태를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도윤이 물었다.
“그러면 절대 다시 안 생기게 만들 수는 없어요?”
의사는 잠시 도윤을 바라봤다.
“절대라는 말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중요한 건 문제가 생겼을 때 빨리 발견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도윤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을 나오면서 도윤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완벽한 몸.
아무 이상도 없는 몸.
다시는 암세포 하나 생기지 않는 몸.
그런 것을 만드는 것이 치료가 아닐지도 몰랐다.
이상이 생겨도
발견할 수 있고,
막을 수 있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몸.
그것이 건강한 몸이었다.
그리고 이제 사회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완벽한 정치인만 찾는 것.
악인을 한 명씩 제거하는 것.
문제가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도윤은 노트를 펼쳤다.
크게 적었다.
누가 나쁜가?
그 문장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아래에 새 질문을 적었다.
왜 같은 문제가 계속 만들어지는가?
한참 뒤,
그 아래에 하나를 더 썼다.
무엇이 그것을 살아남게 하는가?
도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진짜 적의 얼굴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환경이었다.
그리고 그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병은 이름만 바꿔서
계속 돌아올 것이었다.